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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마법소녀물을 근본부터 파괴한 작품인가? 애니메이션 지저귐

* 이 포스팅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줄거리를 누설하고 있습니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이하 <마마마>)의 성공 이후, 일명 '마법소녀'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만화․애니메이션․라이트노벨을 가리지 않고 이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마법소녀 육성계획>, <마법소녀 오브 디 엔드>, <매지컬 고삼즈>,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등등. 그 대부분은 <마마마>처럼 일반적인 마법소녀물의 클리셰를 비틀어놓은 작품들입니다. 사실 '마법소녀물'의 반 세기에 가까운 역사 속에서 이런 흐름은 딱히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를 비롯해서 마법소녀물의 클리셰를 비틀어 놓은 작품들은 이전부터 여러 번 등장했고, <마마마> 역시 그런 작품 중 하나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마마>의 영향으로 탄생한 수많은 작품들 중에 <마마마>의 명성에 도전할 만한 인기와 평가를 얻은 작품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마마 만큼 파격적인 클리셰 파괴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겠습니다.


(리그베다 위키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항목의 일부)

<마마마>에 대한 사람들의 감상을 보면 대부분이 '마법소녀물의 클리셰를 파괴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에 반응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3화에서 마미의 목이 잘리는 장면(일명 '마미루')을 대표적인 예로 들면서, 기존의 어떤 마법소녀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절망적이고 암울한 전개가 작품의 최대 특징이자 성공 요인이라고 분석합니다. <마마마> 이후 마법소녀물의 클리셰를 암울한 방향으로 비튼 작품들이 양산된 것 또한 <마마마>에서 보여준 클리셰 파괴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마마마>는 마법소녀물의 클리셰를 철저하게 파괴한 작품이지만, 마법소녀물의 본질에서 벗어난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존의 어떤 작품보다도 마법소녀물의 본질에 접근한 애니메이션이며, 클리셰 파괴는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법소녀의 목이 잘리고 좀비가 되고 자폭하는 것이 마법소녀의 본질이란 거냐!"라고 소리치고 싶어지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반대로 질문하겠습니다.

목이 잘리고 좀비가 되고 자폭하면 마법소녀가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라고 외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왜 마법소녀가 아닌가요? 뭘 하면 마법소녀가 되고 뭘 하면 마법소녀가 안 되는 거지요? 애당초 마법소녀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마법소녀의 핵심은 '마법+소녀', 그리고 '변신'

마법소녀의 정의는 이름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마법'과 '소녀'입니다. 여기서 '마법'이란 꼭 우리가 흔히 아는 마법이 아니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소녀가 비일상적인 활약을 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이면 됩니다.

그런데 마법소녀물이 아니더라도 신비한 힘을 사용하는 소녀(혹은 소년)의 이야기는 많이 존재합니다. 깊게 파고들 것 없이 '해리 포터'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해리 포터가 마법소녀물과 같은 장르로 취급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마법소녀물의 또다른 특징은 바로 주인공은 평소에는 전혀 특별한 점이 없는 '소녀'라는 점입니다. 주인공이 '마법사'가 아니라 '마법소녀'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마법소녀물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변신해서 싸우지 않을 때의 일상 묘사입니다. 이 순간 마법소녀는 평범한 소녀가 됩니다. 마법소녀물의 가장 큰 특징이자 인기 요인은 '평소에는 평범한 소녀'가 '마법을 쓰며 활약하는 마법소녀'가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자마녀 도레미>(국내: <꼬마 마법사 레미>)에서 도레미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마녀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항상 인간으로 남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소녀'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마법소녀'가 아닌 거지요.

즉, 마법소녀는 '평범한 소녀'와 '마법을 쓰는 소녀' 두 가지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소녀라는 점에서 매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아이덴티티가 한 소녀에게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가 바로 '변신'입니다.



(<극장판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시작의 이야기, 영원의 이야기> 변신 장면)

마법소녀물에서 괜히 변신 장면을 공들여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변신은 말하자면 일종의 '의식'입니다. 평범한 소녀에서 마법소녀로 바뀌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의식 말입니다.


클리셰 파괴는 그저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마마마>는 마법소녀물의 기본을 살리고 있습니다.  본작의 마법소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초인이거나 싸움을 하기 위한 정신을 가진 군인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10대의 감수성을 지닌 소녀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작진은 잊지 않습니다. 마미는 고독한 싸움 속에서 외로워하고, 쿄코와 사야카는 신념을 찾아 방황하고, 호무라는 마도카를 구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좌절합니다. 이것이 <마마마>가 '마법소녀물'로서 갖는 매력입니다.

그러나 제작진이 S라서 마법소녀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보 아키유키와 우로부치 겐은 이제껏 아무도 마법소녀의 목을 자른 적이 없으니까 마미의 목을 자르고, 아무도 마법소녀를 괴물로 만든 적이 없으니까 사야카를 마녀로 만들고, 아무도 마법소녀를 자폭시킨 적이 없으니까 쿄코를 자폭시킨 것이 아닙니다. 마미, 사야카, 쿄코, 그리고 호무라가 작중 내내 겪는 고통은 작품을 이끌어가기 위한 포석입니다. 바로 주인공 마도카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마마>의 줄거리를 마도카를 중심으로 요약하면, 마도카가 '평범한 소녀'에서 '마법소녀'로 '변신'하게 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마법소녀물 같은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마도카 역시 처음에는 자신이 하려는 일이 평범한 마법소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3화 마지막에 마미가 죽는 것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후 10화까지 사야카, 쿄코, 호무라의 비극적인 싸움을 통해서 마법소녀에 대해 마도카가 갖고 있던, 그리고 시청자들이 갖고 있던  마법소녀에 대한 환상을 전부 부숴버립니다. 그러니까 목이 잘려 죽는 잔혹한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고, 초인적인 싸움에 버티기 위해서 좀비 같은 몸이 되어야 하며, 사람들에게 희망만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준 만큼 절망을 줘야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마도카에게 그리고 시청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데도 마법소녀가 되고 싶은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법소녀로서 싸우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건인가?

<마마마>의 마지막에 마도카가 보여준 대답은 Yes였습니다. 최종화에서 마도카는 마법소녀들이 희망을 믿으며 싸운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대답하고, 자신도 그 희망을 지키기 위해서 마법소녀가 됩니다. 마녀의 존재를 없애고 신이 되어서, 사명을 다한 마법소녀들을 맞아들이게 된 마도카의 선택은, 마법소녀의 싸움을 긍정하는 마도카의 대답인 것입니다.


2% 부족한 결말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서는 완벽한 결말이었지만, 많은 수의 시청자들은 <마마마>의 결말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치열한 찬반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결말이 모든 시청자들을 납득시킬 만한 호소력을 갖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 때문으로 보입니다.

1. 3화부터 11화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과정에서 마법소녀의 절망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최종화에서 희망을 긍정하는 마도카의 말을 납득하기가 어렵다.

2. 마도카의 심리 묘사가 상세하지 않아서 어떤 사고과정과 심경의 변화를 통해 소원을 결정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마도카의 소원은 마치 최종화에서 갑작스럽게 정한 것처럼 느껴진다.

3. 신이 되고 세계의 법칙을 개편하는 초월적인 수단을 통한 해결 방식은 일반적인 시청자들이 공감하기가 어렵다. 큐베가 소원을 이루어주는 원리가 작중에서 밝혀진 바 없다는 사실 또한 해결 방식의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그냥 모두가 행복해지게 해달라는 소원 빌면 안 되나?", "왜 이전의 마법소녀들은 그런 소원을 빌지 않았나?" 등의 의문을 부르기 때문이다.

4. 주인공이 평범한 소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결말은, 주인공이 '마법소녀'와 '평범한 소녀'로서 양쪽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일반적인 마법소녀물의 전개를 원한 팬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3번과 4번은 개인의 감상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고, 어차피 다른 결말을 냈더라도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을 부분입니다. 하지만 1번과 2번 문제점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2화에서 마미가 자살하려는 여성을 구해준 장면처럼 마법소녀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꾸준히 암시하고, 이를 통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마법소녀의 싸움에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마도카가 깨닫는 장면이 존재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마치며

<마마마>는 단순히 마법소녀물의 클리셰를 철저하게 파괴해서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클리셰 파괴를 통해 마법소녀물의 본질에 접근하고, 그 과정 끝에 의미 있는 주제를 전달하며, 마법소녀물이란 장르에 새로운 방향을 개척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단순히 '지금까지 마법소녀물에 ~~한 작품은 없었으니까 ~~하게 바꿔보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절대로 <마마마>를 뛰어넘는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저런 논란이 많은 문제작입니다만, 마법소녀물이라는 장르에 시사하는 점이 많은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마마마>를 따라서 마법소녀물의 클리셰 파괴를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마마마>가 전하는 마법소녀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작품을 깊이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바쁜 사람들을 위한 한 줄 요약 : 사야쿄코는 진리.


덧글

  • 아침 2014/06/23 03:52 # 답글

    본인과 의견이 비슷하네요. 덤으로 이 작품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바로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법소녀는 마법을 통해 변신(성장)->변신을 통한 문제해결->내재적 성장에 때른 마법의 불필요성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고전 마법소녀의 경우 성장을 매우 긍정적으로 다루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 역시 성장과정의 하나로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이 작품은 성장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이 인간을 파멸시킬 정도로 끔찍하게 묘사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전까지 고통은 인간을 성장시킨다라는 성장의 대명사가 고통은 인간을 파멸시킨다로 살짝 바뀐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성장 자체는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라지만 이부분이 12화에 거의 몰려 있다는게 역시 위에서 말한 논란이 일어나게 한 거겠죠.) 이전까지의 마법소녀물이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게 멋진 일이란다! 라는 느낌이었다면 어른이 된다는 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필요한 거란다. 라는 어른의 시점에 가까운 느낌으로 만든 거겠죠.

    하지만 본인은 쿄코사야 응원합니...
  • 붉은박쥐 2014/06/23 09:08 #

    그렇네요. 확실히 본작은 고통이 회복할 수 있는 정도인지 아닌지가 일반적인 마법소녀물과 마마마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일반적인 마법소녀물은 '상처를 회복하며 나아가는 성장'이라면 마마마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것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성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죽어버리거나 세상에서 잊혀진 뒤에 성장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리고 저는 커플링에 딱히 순서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 2014/06/23 14: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6/23 15:4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v2baster 2014/06/23 14:23 # 답글

    이 글의 결론은 막줄로 이해하면 되는거군요.

    뭐 본질을 뒤트는건 우로부치가 꽤 잘하는거라..
    그가 뜨게된 작품이랄수 있는 사야의 노래도 내용은
    '진실한 사랑의 이야기' 거든요.

    전 지구급 민폐를 끼쳐서 문제지.
  • 붉은박쥐 2014/06/23 15:47 #

    그런가요? 사야의 노래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우로부치는 실력은 인정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작가라서 그렇게 많은 작품을 보진 않았습니다. (우로부치 작품 중에 제 취향에 맞는 것은 취성의 가르간티아 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취향에 안 맞아도 재밌긴 하니까 보는 거지.) 하지만 그 얼마 안 본 작품들에서도 확실히 그런 티가 나긴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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