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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펀맨] - 알맹이만 남긴 히어로 만화 지저귐

<원펀맨>은 너무나도 강해 어떤 적이든 주먹 한 방 (원펀치)로 끝내버리는 대머리 히어로 '사이타마'의 괴인 퇴치를 다룬 만화로, 최근 애니메이션화로 인해 현재 가장 인기있는 소년 만화 중 하나입니다.

사이타마의 아이덴티티는 3가지입니다. 대머리, 히어로, 한 방(원펀치).

이 중 핵심은 '히어로'입니다.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이것이 <원펀맨>의 주제입니다. '히어로란 무엇인가?' 말이지요. 나머지 두 가지는 그에 대한 답입니다.

대머리, 한 방(원펀치). 둘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고민 끝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기본'입니다.

대머리인 사이타마의 얼굴은 사람 얼굴의 가장 기본 베이스입니다. 사이타마의 옷 또한 망토와 타이즈라는 가장 기본적인 히어로의 복장입니다. 이런 사이타마의 디자인은 '가장 기본적인 히어로'를 상징합니다.

히어로의 외형은 그렇다치고, 히어로가 해야 할 일은? 매우 간단합니다. 악당을 무찌르는 것. 어떻게? 악당을 공격해서. 그리고 공격의 기본은 펀치입니다.

대머리에 망토와 타이즈를 입고, 악당을 향해 한 방의 펀치를 날리는 사이타마. 그것은 바로 히어로의 기본을 뜻합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원펀맨>의 주제도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본'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원펀맨>에는 매우 다양한 개성과 컴플렉스를 가진 히어로들이 등장합니다. 사회적 명성에 집착하는 히어로, 강자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히어로, 공포에 질려 싸우지 못하는 히어로. 사이타마는 그런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히어로란 그저 악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뿐. 그걸로 충분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히어로에게 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원펀맨>은 항상 사이타마가 주먹 한 방으로 괴인을 처치하는 전개로 끝납니다. 그렇게 끝나는 이유는 사이타마가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작품 내적으로야 그 이유가 맞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다릅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이타마에게는 어떤 '악'도 시시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시한 존재와의 싸움을 길게 묘사하는 것 따위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는 사이타마가 주먹을 내지른 순간 이야기를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사이타마에게 불굴의 신념이 있는 이상, 그는 이미 승리자인 거지요.

그 점에서 주목할 만한 캐릭터가 '무면허 라이더'입니다. 무면허 라이더는 사이타마와 달리 전혀 강하지 않은 히어로입니다. 그러나 최강의 히어로인 사이타마와 함께 작중 가장 히어로다운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고 히어로의 본분에 충실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와의 힘의 차이, 자신의 입장, 현재의 상황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똑같으며, 그렇기에 무면허 라이더 역시 힘으로는 괴인들을 이길 수 없을 지언정, 그의 히어로로서의 정신은 사이타마와 마찬가지로 결코 꺾이지 않습니다. 사이타마가 완전한 이상의 상징이라면, 무면허 라이더는 현실 속에서 구현된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이타마를 상징하는 대사 중 하나가 있습니다. "팔굽혀펴기 100회! 윗몸일으키기 100회! 스쿼트 100회! 런닝 10km! 이걸 매일 한다! (중략) 난 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강해져 있었다!"

저는 이 대사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랬더니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더니 나에게 적이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히어로로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갖춘 사이타마도 결코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허무함에 젖어살고 있으며, 자신의 의욕을 불태우게 할 적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적을 만나도 그 허무함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이타마의 고민은 <원펀맨>이 단순한 먼치킨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이타마는 완전한 정의의 구현입니다. 그러나 그 '정의'란 악을 물리치고 더 나의 세상으로 진보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정의가 확고한 사이타마는 어떤 악을 상대로도 위협을 느끼지 못합니다. 완전한 정의이기 때문에 악에게 대항해야 하지만, 정의가 완전해서 악에게 대항심을 느낄 수 없는 딜레마. 이것이 사이타마가 가진 딜레마입니다.

<원펀맨>이 주인공의 초월적인 강함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사이타마의 진정한 적은 악이 아니라 딜레마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악을 아무리 쓰러트려도 사이타마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이타마가 저 딜레마를 깨트릴 때 사이타마의 굶주림은 채워지고 목적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원펀맨>의 이야기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여정입니다.

항상 사이타마에게 상대도 안 되는 괴인들 중에 가장 강했던 괴인은 보로스와 가로우입니다. 보로스는 사이타마의 '강적과 싸우고 싶다는 욕망'을 공유하는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사이타마도 간단히 부정할 수는 없는 인물입니다. 그건 자신을 부정하는 결과와 이어지니까요. 가로우는 히어로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악을 변호하는 인물입니다. '히어로가 무슨 자격으로 악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가'라는 히어로의 근본적인 문제를 공격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역시 간단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이타마가 '진심'으로 부정할 정도의 의욕을 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였을 뿐, 이들도 사이타마의 확고한 정의를 위협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쯤되면 사이타마가 악과 싸우는 것의 의미를 잃고 히어로를 그만둘 법도 하지만, 그는 결코 그러지 않습니다. 히어로에게 정의를 포기해야 할 이유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자신이 히어로로서 진짜 본분을 다할 날을 기다리며, 히어로로서 존재하는 모순까지 끌어안은 채, 어떤 시시한 악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고 정의를 집행합니다. 그래서 그는 진짜 히어로입니다.

[오버로드] - '공포'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공포'가 되다 라이트노벨 지저귐

관련글: [오버로드] - '강한 힘'을 가지는 것만으로, 인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지난번 [오버로드]에 대한 감상에 대해 이런저런 반대 의견을 많이 들었고, 저도 미흡한 점을 많이 느껴서 다시 한번 <오버로드>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주로 아인즈가 '평범한 사람'이라는데 반대 의견이 많았는데, 듣고 보니 이 표현으로는 아인즈와 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인즈의 캐릭터성에서 느낀 매력은 다른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말하는데, 이 '매력'이라는 것은 캐릭터에게 흥미를 갖게 만들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매력'이라는 거지, 아인즈가 뭐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식의 말은 아닙니다.) 좀 고민해본 결과 그게 뭔지 깨달았고, 그랬더니 <오버로드> 자체의 키워드가 뭔지 깨달았습니다.

'공포'입니다.

아인즈의 캐릭터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은 거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작중 누구보다도 공포스러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공포에 짓눌려 사는 캐릭터라는 사실이지요. 이 모순이 아인즈와 <오버로드>의 매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인즈의 캐릭터는 한 마디로 말해 이렇습니다. '최강의 언데드로서 군림하는 소시민 스즈키 사토루'.

아인즈는 공포스러운 존재입니다. 최강의 힘을 가졌고, 공포스런 외형을 지녔으며, 힘으로 세상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절대적인 존재이자 인간이 아닌 존재라서 인간에게 자비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인즈의 모든 공포스런 행동은, 사실 아인즈 본인이 공포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허세'에 불과합니다. 아인즈는 누구보다도 강해서 사실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만, 아인즈는 세상 모든 것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지고의 언데드 아인즈의 정체는 사실 심약한 회사원 스즈키 사토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겁많은 스즈키 사토루는 필사적으로 아인즈를 '연기'하며 불안을 떨쳐내려고 합니다.

아인즈의 행동 원리는 언제나 '공포', 혹은 '불안'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인즈의 행동이 새롭게 이해됩니다.

부하들에게 항상 허세부리는 것? 부하들의 충성을 잃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정보를 얻으려는 것? 세상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힘을 기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언제 보이지 않는 적이 쳐들어 올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언데드로서 인간을 하등한 종족으로 보고 잔인하게 대하는 것? 인간과 대등하게 서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우위에 있는 상황이 아니면 상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하들을 아끼고 적에게는 잔인한 것? 자기 편을 잃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던이 님께서 쓰신 글(아인즈의 성향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에서 아인즈가 사실 가장 약한 사람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인즈는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내면은 너무나도 약합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자신의 적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치고 주위에 이빨을 들이대며 위협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자릭 지하대분묘'입니다.

나자릭은 작중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입니다. <오버로드>의 시작이 나자릭 지하대분묘를 상세히 묘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다는 점이 이를 드러냅니다.

나자릭 지하대분묘에 대해 작중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표현은 '1500명의 대군이 돌파하지 못한 요새'라는 점입니다. 이렇듯 나자릭은 몇 번이고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이미지를 매우 강하게 드러냅니다. 요새라는 것은 지키기 위한 용도로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당연히 아인즈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적으로부터? 말도 안 됩니다. 아인즈에게 적 따위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바로 '공포'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아인즈는 자신을, 그리고 나자릭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공포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새운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르는 아인즈는 헛된 노력을 계속하며 힘을 긁어모읍니다. 힘으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그럼 아인즈의 공포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건 <오버로드>의 서두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오버로드>는 아인즈, 정확히는 모몬가가 함께 해 온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친구들이 아니라, 작중의 험한 현실 세계와 위그드라실의 게임 세계에서 모몬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잃어버린 아인즈는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고, 혼자서 세상에 맞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혼자 내평겨쳐졌다는 공포스런 사실을 아인즈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있지도 않은 과거의 친구들에게 사로잡힙니다. 그들과의 추억이 담긴 나자릭 지하대분묘, 계층수호자들을 필두로 한 NPC들, 그리고 '아인즈 울 고운'이라는 이름을 그가 지켜야 할 모든 것으로 규정하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자신 이외의 모든 세계를요.

이것이 아인즈가 지닌 '공포'의 정체입니다. 아인즈는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전혀 자각 없이.

아인즈는 원래가 세상은 자기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정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된 것이 아인즈가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탓인지, 아니면 아인즈가 원래 세계를 등진 성격이어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둘 다일 겁니다. 원인이 뭐든 간에, 아인즈는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공포에 떨고, 공포에 떨어서 세상을 등지는 악순환에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악순환이 해결될 기미는 없고 피해자들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 출간된 분량까지는요.

공포를 극복하려는 아인즈의 성실한 노력이 주변에는 얼마나 잔인한 '공포'로서 다가오는지 <오버로드>는 매우 치밀하게 묘사합니다. 아인즈는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닌 이들에게는 무정하고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아인즈에게 희생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을 묘사합니다. 각자 목적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던 삶이 아인즈에게 무참히 부서지는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아인즈의 공포스러움과 잔인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아인즈의 세상에 대한 공포심은 지나친 면은 있지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공포는 누구에게나 크든 작든 존재합니다. 그 공포를 철저한 준비 끝에 강력한 힘으로 짓누루는 아인즈의 모습은, 사람들이 내면에 가진 욕구를 투영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힘으로 눌러버리고 싶은 욕구. 그 욕구는 순전히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계를 찾지 못할 경우 얼마나 끔찍한 것이 되는지를 <오버로드>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버로드>가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 이야기가 분분합니다. 적어도 저는 '아인즈가 끝없이 폭주하여 세계정복하고 그걸로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쁘거나 허무한 결말이어서가 아닙니다. 세계를 정복하더라도 어차피 아인즈의 공포는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끝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아인즈는 앞으로 영원히 폭주할 거라는 네버 엔딩 스토리가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아인즈의 공포에 결착을 맺어야만 <오버로드>가 끝날 수 있습니다. 아인즈가 스스로 깨달을지, 아니면 누군가가 깨우쳐줄지, 끝까지 깨닫지 못한 채 파멸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지금 상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만약 세계정복이 성공하는 전개로 간다면, 세계를 전부 손에 넣고도 친구들을 찾을 수 없던 아인즈가 허무함을 느끼고, 그것이 변화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흔히 나오는 이야기잖습니까? 세계정복을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대체 할 게 뭐냐는 이야기. 아니면 말고지만요.

여담으로 얼마 전 <한때 신이었던 짐승들에게>라는 만화를 읽었습니다. 전쟁에서 괴물의 모습으로 싸우던 '의신병'이라는 군인들이, 전쟁이 끝난 후 사회의 해악이 되어 사냥당한다는 내용이었지요. 그 중 두 번째로 등장한 미노타우로스 병사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병사는 죽는 게 무서워서 싸우지도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당시 상관이었던 주인공에게서 '죽는 게 무섭다면 죽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야 한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덕분에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는 도시 안에 미궁요새를 만들고 시민들에게 전쟁준비를 강요하며 해악을 끼칩니다.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요새가 모순적으로 세상을 적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길로 빠진 부하를 주인공은 자기 손으로 처단하고, 미노타우로스는 그제서야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세상이 두려워 자신을 미궁 안에 가두고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미노타우로스. 그 모습이 아인즈와 겹쳐 보이더군요. 나자릭 지하대분묘에 자신을 가두고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 있는 아인즈 말입니다.

[오버로드] - '강한 힘'을 가지는 것만으로, 인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라이트노벨 지저귐

<오버로드>는 온라인 게임에서 마왕 같은 위치로 군림하던 주인공 '아인즈 울 고운'이 부하들과 함께 이세계로 전이된 후,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름 설치다가 점차 폭주해서 진짜 마왕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세세하게 따지면 좀 다른 이야기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한 것이니 양해해주세요.

<오버로드>의 주인공은 마왕입니다. 불사의 육체를 지녔고 인간다운 감정이 없으며, 혼자서 세계를 위협할 만한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마왕답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세계정복도, 세계멸망도 꿈꾸지 않습니다. 뒤에 가면 어쩌다 보니 세계정복을 추진하지만 자기 원하던 바는 아닙니다. 본래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습니다. 그런 소시민답게, 그저 자기 안위와 자기와 친한 사람 몇몇만을 챙기며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아인즈를 주변에서는 마왕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째서? 자기와 가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이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건 아인즈가 난폭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평범한 소시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구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저 막연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는 것뿐이고, 그것을 가차없이 휘두르는 것은 자기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는 소박한 욕구 때문입니다. 매우 인간적인 행동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그저 아인즈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비칠 뿐.

아인즈의 정체는 단순합니다. 터무니없이 강한 힘을 가진 평범한 인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오버로드>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옆에 사람이 있다면, 잠깐 그 사람을 바라보세요. 그 사람이 안전해 보이나요? 왜? 미치지도 않았고 위험한 사상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평범한 사람'은 결코 안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안전한 이유는 평범해서가 아니라, 그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아인즈처럼 터무니없는 힘을 얻고, 자기 주변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려고 드는 순간, 그는 무자비한 마왕으로 돌변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 옆에 있는 사람도, 그리고 당신도.

인간이 '자신하고 상관없는' '약자'에게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것이 <오버로드>를 읽고 얻을 수 있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유명한 이야기 하나로 마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친절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고, 자기 부하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고 다니며 절대 막 대하지 않았으며, 가족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해서 예술을 좋아했고 눈물이 많았습니다. 금욕적이여서 술을 마시지 않았고 채식주의자였습니다. 동물 애호가여서 동물 보호에 앞장서기도 했고요.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 솔직함이 매력적인 이유 애니메이션 지저귐

극장판 애니메이션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이하 <마음이>)를 보고 왔습니다.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로 유명한 제작진의 오리지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순수한 오리지널 극장판으로서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흥행을 올렸습니다.

내용은 간단한 듯 하면서 복잡합니다. 어릴 적 수다쟁이였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된 소녀 나루세 준이 문화제 실행위원으로 뽑히면서 뮤지컬을 하게 됩니다. 말은 못해도 노래는 할 수 있던 준은 자기가 하고 싶던 말을 뮤지컬로 바꿔서 전하고 반 친구들과 마음을 열게 됩니다. 하지만 문화제를 앞두고 실연을 당하면서 다시 마음을 닫고, 그래도 짝사랑 상대 사카가미의 설득을 받고 진짜로 자기 마음을 전하기 위해 뮤지컬에 다시 섭니다.

<마음이>의 핵심은 오로지 여주인공 나루세 준의 캐릭터에 있습니다. 준의 캐릭터가 흥미로운 점은 말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은 못하는데 사실은 수다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항상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지만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배가 아파져서 말을 못합니다. 말 때문에 상처 입을까봐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나루세의 캐릭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말하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그녀가 사실 누구보다도 솔직한 캐릭터라는 점입니다. 나루세는 마치 아이 같습니다. 하는 말이 직설적이고 솔직한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루세가 하는 말과 행동은 사람들을 끌어당깁니다. 사람들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면 회피하기 마련입니다. 작중 또다른 주연들인 사카가미, 니토, 타자키 등도 전부 그렇습니다. 중요한 문제에서 눈을 돌리고 조용히 다른 길로 돌아가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놔둬버립니다. 그러나 나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는 문제에 항상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그 결과 깨져서 말조차 못하게 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솔직하게 도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이 아이를 동경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루세가 모두와 도움을 주고 받으며 성장하는 전개는 멋있었지만 역시 연애노선의 결말은 시원찮습니다. 사카가미가 대체 왜 나루세를 놔두고 니토를 좋아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나루세는 사카가미가 지닌 트라우마를 치유해주기 위해 온갖 도움을 줬지만 니토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카가미가 가장 힘들어 할 때 도망치기나 했습니다. 도대체 나루세에게는 없고 니토에게는 있는 매력이 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작진은 아마도 나루세가 실연당할 것을 알면서도 자기 마음을 전하는 전개를 통해, '말 때문에 상처를 입더라도 말을 전해야 한다.'라는 주제를 전하고 싶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주제도 좋긴 하지만 좀 더 설득력 있고 공감 가는 전개는 없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마침 이 애니의 주제이기도 하니, 하고 싶은 말을 솔직히 말하자면, 이딴 결말은 맘에 안 듭니다.

하지만 연애물로서는 어쨌든, 실연의 아픔을 딛고 나루세가 성장하는 성장물로서의 결말은 최고였습니다. 저도 나루세처럼 자신을 억누르는 공포를 깨고 한 발짝 성장하고 싶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in <데미안> (헤르만 헤세 作)


P.S. 나루세를 두고 '목소리가 예쁘다'라는 표현이 수없이 나오는데, 나루세보다 니토의 목소리가 더 예쁘다는 건 저만 드는 생각일까요?

[SHIROBAKO] 시간을 초월하여 이어지는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지저귐

참고: [SHIROBAKO]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이어지는 사람들

어제 <SHIROBAKO>(이하 <시로바코>) 관련 리뷰를 올렸는데, 만족스럽지 않던 참에 문득 새로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두 번째 감상을 올립니다.

어제 올린 글에서는 <시로바코>의 핵심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적어놓고도 이걸로는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 소재일 뿐이지 주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게 핵심이라면 앞으로 애니 제작을 다룬 애니는 전부 <시로바코>처럼 대성공해야 맞겠지요. 하지만 그럴 리는 없습니다. <시로바코>에는 그것 이상의 뭔가가 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시로바코>의 서두에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로바코>의 시작은 주인공인 5명의 소녀들이 고등학교 시절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앞으로 계속 애니를 만들 것을 맹세하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 직후 어른이 되어 애니 업계에 뛰어든 시점부터 본편이 시작되고요. 그리고 각자 애니 업계의 일원이 되어 다 함께 하나의 애니를 완성하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것이 <시로바코>에 집중하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시로바코>는 애니 업계의 현재 모습을 담아내는 작품이 아닙니다. <시로바코>는 '꿈'입니다. 과거에 꾸던 꿈을 현재에 와서 현실로 만들고, 그것을 미래까지 이어간다. 그래서 저는 제목에서 <시로바코>를 '시간을 초월한다'라고 썼습니다.

<시로바코>에는 '시간을 초월'하는 소재가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고등학교 동아리부터 이어진 주인공들, 오랜 역사를 지닌 제작사 무사시노 애니메이션, 2쿨로 넘어가며 일어나는 세대 교체. 고등학교 시절 고립무원으로 애니를 만들던 미야모리는 무사시노에 와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 힘을 받습니다. 이데폰(이데온)의 전시를 보거나, 어릴 적 애니의 꿈을 심어준 안데스 처키를 만든 사람들을 직접 만나거나, 셀 애니메이션 시절의 자료를 직접 발굴하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그렇게 얻은 힘을 현재의 역량으로 바꿔 나가고, 새롭게 애니 업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줍니다.

그래서 <시로바코>의 이야기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어린 시절 혼자서 꾸던 꿈을, 어른이 되어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과거부터 전해진 인연을 통해 얻은 힘으로 이루는 이야기.' 5명의 소녀들은 애니를 만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그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몸담은 업계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과거에 먼저 노력해온 사람들의 힘을 합쳐 그들은 꿈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미래에 새로 나타날 사람들의 힘과 합쳐지며 다음 꿈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애니를 만드는 것은 고된 일입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꿈이 있었기에, 그리고 똑같은 꿈을 함께 이루기 위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고, 같은 꿈을 꿨던 사람들이 과거부터 존재했기에 우리는 애니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제작진이 전하고 싶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과거에 같은 꿈을 꾸던 누군가의 힘을 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꿈에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자신감을 갖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꿈에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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